체험해봐 나만의 시크 알고있니? 듣는 매체, 라디오 ㅋㅋㅋㅋ릿! 당의 서역 속령화 경략 ㅋㅋㅋㅋ

2020. 10. 21. 06:33카테고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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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당대에 이르러 강대한 국력을 바탕으로 한대 이후 약 500년 동안 중단되었던 대(對)서역 속령화 경략을 재개하였습니다.
한의 서역 경략이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흉노와의 쟁탈전으로 일관했습니다면, 당의 서역 경략은 기민한 전략전술로 돌궐(突厥)과 각축하면서 진행되었다.
수(隋) 말 당(唐) 초까지 서역 제국은 그 대부분이 서돌궐에 신속(臣屬)되어 있었는데, 당 정원(貞元) 12년(638)에 서돌궐이 내분에 의해 동 · 서로 분열되어 국력이 약화되자, 당은 이 기회를 이용해 서역에 대한 속령화 경략을 본격화하였습니다.
당의 서역 경략은 태종(太宗) 연간(재위 627~649)에 현 신장위구르자치구 동부와 중부 일대를 개척함으로써 서역 경략의 기초를 닦아놓은 제1기와 고종(高宗) 연간(재위 649~683)과 현종(玄宗) 연간(재위 713~756)에 서역 속령화 경략 범위를 페르시아까지 확대한 제2기 전성기로 나뉜다.
이러한 경략은 서역 제국에 대한 당의 군사적 공략과 더불어 기미정책(羈縻政策)을 통해 정치적으로 제압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기미정책이란 굴레를 씌워 말을 다루듯 책봉(冊封) · 숙위(宿衛) · 조공(朝貢) 등 전략전술적 수단을 통해 소국을 견제하고 복속시키는 종주국의 경략정책을 말합니다.
640년에 당은 서역에 정주(庭州) · 안서(安西) 두 도호부(都護府)를 신설한 데 이어 얼마 뒤 정주에는 금산(金山) 도호부와 북정(北庭) 도호부를 증설해 톈산(天山) 산맥 북록과 알타이 산맥 일원을 통제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원래 서주(西州)에 자리했던 안서도호부를 648년에 구자(龜玆)로 옮겨 예하에 구자 · 소륵(疏勒) · 우기(于闐) · 언기(焉耆) 4진(鎭)을 두었다.
658년 당조는 서돌궐의 하로(賀魯)를 멸하고 일시 서주로 갔던 안서도호부의 치소를 구자로 다시 옮겨옴과 동시에 중앙아시아 아무다리야강 유역까지의 파미르 고원 이서 지방에는 이른바 기미주(羈縻州)를 여러 개 신설하였습니다.
그리하여 7세기 60년대 초까지 당은 중앙아시아의 시르다리야와 아무다리야 두 강 유역 일대까지를 경략함으로써 파미르 고원 이서에 군림하고 있던 서투르키스탄(서돌궐)의 영지 내에 22개의 도호부를 유지하였습니다.
이는 중국 역사상 서쪽 가장 멀리까지 영토가 확대된 경우다.
그러나 당의 이러한 서역 속령화 경략은 서진(西進)을 노리는 토번(吐蕃, 티베트)과 파죽지세로 동진한 신흥 이슬람 세력의 협공에 직면해 와해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러한 서역의 도전은 740년부터 750년에 걸쳐 이뤄진 고선지(高仙芝)의 5차 서정(740년 달해부(達奚部) 원정, 747년 소발률(小勃律) 원정, 750년 걸사국(朅師國) 정토, 750년 석국(石國) 원정, 751년 탈라스 전쟁)으로 인해 일시 제압되고, 서역 제호(諸胡, 달해부 원정 때의 72개국)는 다시 당에 복속되었다.
그러나 751년 7월 고선지가 제5차 서정인 탈라스(Talās) 전쟁에서 패배해 파미르 고원 이서의 속령지들을 거의 잃게 되었다.
이에 당은 서역 경략에 치명상을 입었다.
사실상 고선지의 탈라스 원정 패전을 계기로 파미르 고원 이서(서투르키스탄)에 대해 당은 경략권을 잃었다.
한편 여러 차례에 걸친 서정으로 인해 파미르 고원 이동 지역(동투르키스탄)의 항당(抗唐)세력이 제거됨으로써 이 지역에 대한 당의 경략권이 확보되었다.
이때부터 오늘날까지 이 지역은 줄곧 중국의 판도 내에 편입되었다.
요컨대 당대 이후 동투르키스탄은 중국 영토의 한 구성부분으로서 내치(內治) 지역일 뿐, 더이상 경략 지역은 아니었다.
동방의 통일 대제국으로서 진취적인 개방정책을 추구한 당의 서역 속령화 경략은 중국과 서역 간의 문명교류를 비롯한 전반적인 동서교류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우선, 오아시스로의 기능이 강화되고 그 노정이 최종적으로 확정된 것을 들 수 있습니다.
당의 서역 경략은 주로 서투르키스탄까지 이르는 오아시스로를 통해 이루어졌다.
당의 서역 경략을 계기로 서아시아의 신흥세력인 아랍-이슬람제국과의 접촉이 이루어져 이 길의 기능은 전례없이 강화되었다.
종래에는 교역이나 왕래가 구간별로 간접적이며 단절적으로 이루어졌으나, 이제는 전노선에 걸쳐 직접적이며 연관성 있게 추진되었다.
그 결과 오아시스로의 서단(西端)을 타림 분지나 파미르 고원 일대로 국한하고 그밖의 노선은 한낱 연장선이나 보조선쯤으로 간주하던 종래의 오아시스로에 대한 관점은 발전적으로 극복되었다.
이에 따라 여러 갈래의 길이 크게 남 · 북 양도로 통합 · 정착되었다.
오아시스로의 북도(北道)는 중국의 뤄양(洛陽)이나 장안(長安)에서 시작해 안서(安西, 둔황 이동)에서 남도(南道)와 갈라져 이오(伊吾, 현 하미(哈密)) · 고창(高昌) · 언기 · 구자(현 쿠처(庫車))를 지나 소륵(카슈가르, 현 카스(喀什))에서 파미르 고원을 넘어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Tashkent) · 사마르칸트(Samarkand) · 부하라(Bukhara), 투르크메니스탄의 메르브(Merv), 이란의 니샤푸르(Nishāpūr) · 라가에(현 테헤란), 아르메니아의 예레반(Yerevan), 터키의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을 지나 로마에 이르는 길입니다.
이에 비해 남도는 역시 뤄양이나 장안에서 출발해 안서에서 북도와 갈라진 후 둔황 · 누란(樓蘭) · 우기(于闐)를 지나 피산(皮山)에서 남진해 인더스강 상류를 따라가다가 서행해 아프가니스탄의 카불, 파키스탄 북부의 칸다하르(Khandahār, 간다라), 이란 남부의 케르만(kermān), 이라크의 바그다드, 시리아의 팔미라(Palmyra), 레바논의 베이루트(이곳에서 해로로 콘스탄티노플이나 로마에 이르기도 함)에 도착한 후 지중해 동남해안을 따라 이집트의 지중해 해안도시 알렉산드리아까지 이어지는 길입니다.
이 남 · 북 양도는 오아시스로의 간선이며, 그밖에 여러 지선들이 종횡무진으로 이 간선과 잇닿아 있습니다.
이러한 간선과 지선을 포함한 오아시스로는 당의 서역 경략을 계기로 그 기능이 한층 더 강화됨과 동시에 노선이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다.
두번째 영향은 중국과 서역 간의 문물교류에 새로운 차원의 장이 열렸다는 점입니다.
서역 경략을 계기로 당의 비단 · 도자기 · 철기 · 금은세공품 등이 서역에 다량 수출되고, 연단술(煉丹術) · 제지술(製紙術) · 맥학(脈學) 등 과학기술이 서역에 처음으로 전해졌으며, 이때 회화(繪畵)도 소개되었다.
특히 고선지의 탈라스 원정을 계기로 중국의 제지술이 이슬람세계에 도입되었으며(8~9세기), 이는 다시 12세기경에 유럽에 전수되었다.
한편 서역으로부터도 각종 문물이 중국에 대거 유입되었다.
당시 중앙아시아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소무구성(昭武九姓)의 소그드(속특(粟特)) 상인들에 의해 모직물 · 향료 · 주옥(珠玉) · 보석(슬슬(瑟瑟) 등) · 양마(良馬) · 약재 등 서역 특산물이 교역되었다.
당 경략 당시 서역을 통해 서역 불교가 큰 폭으로 전입된 것은 물론이거니와, 새로이 이슬람교 · 경교(景敎, 네스토리우스파, 고대 동방기독교) · 마니교 · 조로아스터교 · 유대교 등 여러 서방 종교가 동양에 전파되었다.
뿐만 아니라 서역과의 교역이나 인적 왕래를 통해 다양한 서역 예술이 유입되었는데, 그 흔적은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습니다.
그중 두드러진 것은 가무와 미술입니다.
일반적으로 호악(胡樂)이라 불리는 서역 음악은 한대에 전래되기 시작하여 위진남북조 시대에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확대합니다가 수 · 당대에 와서는 중국 악부(樂府)에서 하나의 중요한 체계로 자리를 잡으면서 중국 악부의 변화 ·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당대의 악부에는 서역악 주도의 십악부(十樂府), 즉 연악(燕樂) · 청악(淸樂) · 서량악(西凉樂) · 천축악(天竺樂) · 고려악(高麗樂) · 구자악(龜玆樂) · 안국악(安國樂) · 소륵악(疏勒樂) · 강국악(康國樂) · 고창악(高昌樂)이 배치됨으로써 중국 전통음악인 종성(鐘聲) 위주의 아악(雅樂, 궁중의식에서 연주되는 전통음악)은 구자악 위주의 호악에 밀려나고 말았습니다.
서역 무용인 호무(胡舞)도 장안이나 뤄양에 풍미하고 있었고, 불화(佛畵)나 불소(佛塑)에서도 인도의 굽타식을 비롯한 서역풍 조형법이 성행하였습니다.
둔황 막고굴(莫高窟, 천불동(千佛洞))의 현존 476개 동굴 중 213개가 당대에 축조된 것인데, 대부분 벽화는 서역풍의 불화다.
그밖에 인도의 천문학이나 의학 등과 같이 서역에서 걸러진 후 전래된 문물도 적지 않다.
끝으로, 당의 서역 속령화 경략이 중국과 서역 간의 문물교류에 미친 영향은 빈번한 인적 왕래에서도 나타납니다.
당대, 특히 당의 서역 경략 시기에 많은 서역인들이 당에 왕래하거나 이주해 여러 직종에 종사하면서 두 지역간의 문물 전달자 · 전파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그들을 출신이나 직업에 따라 다섯 부류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 부류는 주로 왕자를 비롯한 귀족 자제들로서 사신(使臣)이나 숙위질자(宿衛質子, 볼모로 잡혀가 있는 벼슬아치의 자식)들입니다.
8세기 후반에 토번이 허시(河西) 지역을 점령하자 서역으로 가는 통로가 막혀 귀국하지 못하고 당에 잔류하게 된 서역의 사신은 무려 4,000명이나 되었다.
그들 대부분은 군에 징집되었는데, 왕자의 경우는 병마사(兵馬使)나 압아(押牙) 같은 고위 군함(軍銜, 군직)을 받았습니다.
위정자들이 속민(屬民)을 이끌고 집단이주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예컨대 강국(康國)의 대수령(大首領) 강염전(康艶典)은 정관(貞觀) 연간(627~649)에 ‘호인(胡人)’들을 이끌고 선선(鄯善)으로 옮겨 오아시스로의 남도 요지에 석성진(石城鎭) 등 4개 진을 건설하고 강국인들의 집단이주 지구를 형성하였습니다.
둘째 부류는 당에 들어가 군직(軍職)에 종사한 사람들입니다.
당조에는 무신에 기용된 서역인들이 적지 않았는데, 그중에서 강국과 안국 출신이 가장 많았습니다.
안녹산(安祿山)은 원래가 강국인이었으나 안씨(安氏) 성(姓) 집안에서 부양을 받았기 때문에 ‘안(安)’으로 성을 바꿨다.
부장(副將) 강원보(康元寶)도 강국인이고, 장령(將領) 안흥귀(安興貴)와 이포옥(李抱玉) 등도 강국 출신입니다.
셋째 부류는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호상(胡商)들입니다.
그들 중에는 일반적으로 소그드인이라고 부르는 강국인과 안국인들이 다수를 차지하였습니다.
강국의 호상 출신인 강겸(康謙)은 천보(天寶) 연간(742~756)에는 안남도호(安南都護)를 지내다가 숙종(肅宗) 때에 와서는 홍로경(鴻臚卿)으로 승진해 외국사절들에 대한 접대 업무를 총괄하였습니다.
당 후기에 재상이 된 필성(畢誠)은 흔히들 ‘상도(商都)’라고 하는 필국(畢國) 출신입니다.
호상들은 상품교역에만 종사한 것이 아니라, 회흘전(回紇錢) · 파사전(波斯錢) 같은 화폐를 매개로 한 금융업에도 종사하였습니다.
넷째 부류는 불교 · 조로아스터교 · 마니교 등 종교계의 승려나 전도사들입니다.
7세기에 이르러 불교가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쇠퇴해가자 불승들은 유망한 전도의 땅을 찾아 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당대 화엄종(華嚴宗)의 제3대조인 현수대사석법장(賢首大師釋法藏, 643~712)은 강국인이고, 석승가(釋僧伽, 628~710)는 하국(何國)인이며, 석신회(釋神會, 720~794)는 석국(石國)인입니다.
7세기 중앙아시아에서 불교가 점차 쇠퇴일로를 걷는 틈을 타서 성행한 조로아스터교와 마니교는 중앙아시아를 거점으로 하여 당에 전입되었다.
특히 조로아스터교는 소그드인들이 신봉하는 주요 종교로, 그들의 왕래에 따라 신속히 당에 전파되었다.
중앙아시아에서 조로아스터교가 기세를 올리자 이에 밀린 네스토리우스파와 마니교는 당으로의 전파에서 그 활로를 찾으려고 하였습니다.
한편 현장을 비롯한 많은 당나라 승려들이 서역에 왕래하거나 서역을 통해 도축구법(渡竺求法)하였습니다.
이들에 의해 서역 불교가 소개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남긴 여러가지 귀중한 여행기들을 통해 서역에 관한 지식이 전달되기도 하였습니다.
다섯째 부류는 화가 · 악사 · 무희(舞姬) 등 예술인들입니다.
당의 서역 경략 시기를 전후해 많은 서역 예술인들이 내당해 갖가지 서역 예술을 소개 · 전파하였습니다.
내당한 화가로는 강국과 하국, 악사로는 미(米) · 조(曹) · 안 · 강국, 무희로는 강 · 안국 출신들이 다수를 차지하였습니다.
당에 유입되어 유행한 호등무(胡騰舞)와 자지무(柘枝舞)는 석국에서, 호선무(胡旋舞)는 강국에서 각각 전래된 것입니다.
심지어 현종(玄宗) 때는 강 · 미 · 사(史) · 구밀(俱密) 등 나라에서 무희를 예물로 삼아 헌상한 적도 있습니다.
당과 서역 간의 이러한 상호 유민(流民) 교류를 입증이라도 하듯, 당대 사적에는 ‘번호(蕃胡)’나 ‘주번(住蕃)’ 같은 조어가 새로이 등장하는데, 이는 상호 이주와 인적 왕래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서 중국 역사상 초유의 일입니다.
‘번호’란 돌궐 · 회흘 · 토번 · 소무구성 · 페르시아 · 아랍 · 인도 · 고구려 · 신라 · 일본 · 곤륜노(崑崙奴) 등에서 당에 이주해 거주하는 외국인들을 일괄 지칭합니다.
수도 장안에 설치한 홍로사(鴻臚寺)는 이들 번객(蕃客)들에 관한 사무를 전담하였고, 광저우에는 호상들의 집단 거주구역인 ‘번방(蕃坊)’이 있었습니다.
이에 반해 ‘주번’이란, 당인들이 외국에 이주해 거주하는 것을 말합니다.
당시 주번 당인들로는 상인 · 장인(匠人) · 범죄도피자 · 전쟁포로, 그리고 기타 평민들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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